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6세 (문단 편집) ===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왕위에 오르다 === 잉글랜드 왕 [[헨리 5세]]와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 왕 [[샤를 6세]]의 딸 [[카트린 드 발루아|발루아의 카트린]] 사이에서 태어났다. 헨리 5세 사망 직후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때가 1422년이었다. 그러니까 '''[[어린 나이에 즉위한 군주들|한 살도 되기 전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는데 정확하게는 생후 9개월이었다.]]''' 그리고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지 2개월이 지나고 나서 외할아버지 [[샤를 6세]]가 갑자기 정신병으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트루아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스의 왕까지 되었다. 이때 헨리 6세의 나이는 고작 생후 11개월이었다. [[파일:잉글랜드 국장(1422-1471).svg.png|width=200]] 헨리 6세의 문장. 왼쪽에 프랑스의 상징인 백합 문장, 오른쪽에 잉글랜드의 상징인 사자와 백합을 섞은 문장을 넣었다. 백년전쟁 때부터 잉글랜드는 자국 문장에 프랑스 백합 문장을 섞기 시작했다. 그래서 사자보다 백합이 더 많아 보인다(...). 옆의 동물들은 영양이다. 옹알이도 못 하는 나이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왕이 된지라, 성년이 될 때까지 숙부인 [[랭커스터의 존|베드퍼드 공작 존]]과 [[글로스터]] 공작 험프리가 사실상 왕권을 휘어잡고 놀았다. 급기야 외숙부인 [[샤를 7세]]가 트루아 조약의 비적법성을 주장하며 [[랭스]]에서 [[대관식]]을 올리자[* 원래 랭스도 잉글랜드군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때 [[잔 다르크]]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이 랭스를 탈환했다. 랭스는 프랑스 왕들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올리던 도시였다.], 자기 자신도 1431년에 파리로 가서 프랑스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올렸는데 이때의 나이가 10살이었다. 이때 [[잔 다르크]]의 활약 없이 [[백년전쟁]]이 당시의 전황대로 종결되었다면 그는 앙리 2세라는 이름으로 [[동군연합|프랑스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.]] 그러나 4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[[카페 왕조]]는 프랑스의 귀족과 인민에게 통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았고, 이는 원시적인 내셔널리즘(민족주의)과 맞물리며 잉글랜드인이 아닌, 랭스 대성당에서 [[도유식]](塗油式)을 거쳐 즉위한 [[프랑스인]]만이 진정한 [[프랑스 국왕]]으로 [[왕권]]을 행사할 수 있다는 관념으로 나아갔다.[* 백년전쟁의 단초가 된 발루아 백작 필리프의 왕위 계승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. 당시 왕위 계승에 있어 여성 승계가 아닌 모계 계승(외손)이 금지된다는 법칙은 없었고, [[에드워드 3세]]는 [[샤를 4세]]와 가장 가까운 친족이면서 탁월한 자질을 갖췄다. 그러나 대제후 회의는 프랑스의 왕권은 프랑스 출생으로 프랑스적 본성을 갖춘 이가 행사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, 결국 왕위는 모계 직계이지만 외국 왕이기도 한 에드워드가 아닌, 부계 방계이지만 완전한 네이티브 프랑스인인 [[발루아 왕조]]에게 넘어간다.] 결국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의 통치권조차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로렌 동레미 지역의 소녀가 이 '신성한 왕권' [[이데올로기]]에 감화되어 전장에 나서 전황을 뒤집었으니 가히 백년전쟁이 양국의 국가 체계 발전에 끼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